[포토스토리] 세계적 명품 구두에 도전하는 '성수동 수제화 거리'
[포토스토리] 세계적 명품 구두에 도전하는 '성수동 수제화 거리'
  • 류수근 기자
  • 승인 2019.07.15 15:5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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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가경제 류수근 기자] 서울 지하철 2호선 성수역에 내리면 다른 역에서는 볼 수 없는 풍광이 기다리고 있다. 역내는 물론 역 외부 곳곳에서 멋지고 세련된 구두 그림과 사진, 그리고 구두 제조과정과 관련된 전시물들을 만날 수 있기 때문이다. 바로 ‘성수동 수제화 거리’의 꿈과 도전이다.

특히 성수역사 내 2층 통로공간에는 수제화 거리의 역사를 한 눈에 확인할 수 있는 구두테마전시공간이 마련돼 있고, 1층에는 수제화 공동매장이 손님들을 마중하고 있다.

서울 성수동은 수제화 관련 제조업체들이 집약된 국내 최대의 수제화 산업 지역이다. 빠르게 진행하는 탈산업화시대에 서울의 제조업이 살아 있는 대표적인 준공업지역이다.

 

[사진= 메가경제]
성수역 2층 통로구간에 마련된 '성수동 수제화 거리' 역사 전시물 '슈스팟 성수'. [사진= 메가경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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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의 역사는 1970년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수제화 업체들이 서울에서 상대적으로 땅값이 저렴한 성수동에 하나 둘 모여 들면서 수제화 산업의 요람으로 자리잡았다.

대도시의 제조업과 고용률이 갈수록 줄어드는 상황에서 수제화 산업 지역의 고민도 적지 않다. 외국산 저가 구두의 공세, 기술을 이어갈 사람의 부재 등 극복해야 할 과제가 한두 가지가 아니다.

하지만 성수동 수제화 거리에서는 ‘세계적인 명품 구두에 도전한다’는 수제화 장인들의 의지를 곳곳에서 느낄 수 있다. 구두테마공간과 수제화공동매장의 전시물과 내용을 토대로 성수동 수제화 거리의 발자취를 살펴보고 그들의 한없는 열정과 꿈을 엿본다.

 

성수역사 1층 에스컬레이터 입구에는 '성수 수제화 거리' 지도와 '성수 수제화 거리 이야기' 안내문이 설치되어 있다. [사진= 메가경제]
성수역사 1층 에스컬레이터 입구에는 '성수 수제화 거리' 지도와 '성수 수제화 거리 이야기' 안내문이 설치되어 있다. [사진= 메가경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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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수동 수제화 산업 지역. [사진= 메가경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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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8월 성수동 수제화 산업 실태조사 자료. [사진= 메가경제]

 

성수역 2층 통로구간의 벽에는 '성수동 수제화 거리'에서 역사를 만들어온 수제화업체들 이름과 위치지도가 컬러플한 구두 그림과 함께 꾸며져 있다. 갖가지 구두 디자인을 눈여겨 보면 수제화의 매력을 간접적으로도 체험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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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수역 2층 통로구간의 구두테마전시공간에서는 서울 수제화 산업의 역사를 한눈에 확인할 수 있다. 성수동 수제화산업의 가치 확산과 홍보를 조성한 이 공간에는 구두지음, 슈다츠, 구두장인공방, 다빈치 구두 등이 꾸며져 구두와 성수동 수제화의 모든 것을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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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두지음'(GUDUSEUM) 코너에는 개화기, 서양문물의 대표 물품이었던 구두가 오늘날 국민들의 발이 되고 멋이 되기까지의 역사를 볼 수 있다. 여기서는 해방 이후 염천교, 명동을 거쳐 성수동에 이르기까지 우리나라 수제화 산업의 변천사를 한 눈에 확인할 수 있다. 

서양문물이었던 구두가 우리 국민들의 생활에 한층 더 다가가면서 우리나라에서도 수제화산업이 움트기 시작했다. 1960년대까지 서울역 염천교를 중심으로 형성된 구둣가게들은 1970, 1980년대 명동, 1990년대 이후 성수동으로 옮겨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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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0년부터 1960년까지는 서울역 염천교 시절이다. 염천교는 서울역에서 중림동으로 건너가는 다리 이름이다. 

염천교 시절에는 중구 의주로 2가 염천교 일대 구두점들의 밀집이 시작됐다. 1925년 경성역(현 서울역)이 생기면서 잡화상과 함께 구두수선점이 생겨났다. 해방 후 미군들이 중고 전투화(워커)로 훌륭한 신사화를 만드는 가게가 문을 열면서 번창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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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년부터 1980년까지는 명동 시절이었다. 당시 최신 유행을 선도하는 지역이었던 명동에는 양복점, 양장점, 양화점 등 '양(洋)'자 들어가는 가게들이 매우 많았다. 1970년대 '양(洋)'이라는 접두어가 붙은 사물은 선망의 대상이었다.

우리나라 금융과 경제의 중심지였던 명동의 싸롱화와 양복점은 당시 연예인과 재벌들의 에피소드로 유명세를 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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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대 상공부에서는 세계우수상품 시작품 경연대회를 개최했다. 명품을 따라잡기 위해 장인들로 하여금 외국의 제품을 유사하게 만들어 구두 및 봉제산업을 수출산업으로 육성하기 위해서였다. 에펠, 신일, 알프스, 금강제화 등 싸롱화집이 번성했다.

1980년대 공무원 월급이 35만원 하던 시절, 상급 기술자의 경우 120만원 정도 수입을 올렸단다. 싸롱화를 세일하는 날이면 경찰이 나와 단속해야 할 정도였다니 당시 수제화의 인기를 실감케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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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년부터 2014년까지는 성수동 시절이다. 명동이 공장과 매장을 함께 운영하는 싸롱화의 중심지였다면 서울 시내에서 구두공장 밀집지역은 금호동이었다. 1960년대 말 금강제화 생산공장이 금호동 지역에 들어서면서 하청 공장들이 자리잡았다.

그러나 1997년 외환위기를 계기로 금강제화 생산본부가 옮기며 구두관련 공장들도 흩어지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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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환위기를 겪으며 싸롱화가 쇠퇴의 길로 접어들자 구두공장들은 성수동에 자리를 잡았다. 

성수동에 구두공장들이 몰려든 이유는 금강제화 본사가 있으며 성남에 있는 에스콰이어, 엘칸토 생산공장과도 가까워서였다. 성수동에 구두공장들이 모여들고, 가죽과 액세서리, 부자재 등 구두재료 업체들도 늘어났다.

이들은 한때 국내에서 생산되는 수제화의 대부분을 책임졌다. 1990년대 이후 지금까지 성수동은 구두 장인들의 삶의 터전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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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7년 강화도조약에 따른 개항 이후 개화사상은 조선 사회에 일대 변화를 가져왔다. '개화'는 당시 최대 유행이었고 개화에 앞장서는 이들은 '개화꾼'으로 불렸다. 개화꾼들은 개화경(안경), 양복, 자전거 등 개화문물들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였다. 구두 역시 개화꾼들이 선망하는 개화문물 중 하나였다.

개화문물은 우리 조상들의 환경과 생활양식을 바꾸기 시작했다. 구두 역시 대표적인 개화문물이었다. 1886년, 우리나라 최초의 주간신문인 '한성주보'에는 서양직물, 시계 등 서양문물을 판매한다는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광고가 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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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0년대 서재필 등 개화파 인물들과 민영익 등 미국, 일본에서 귀국한 외교관들은 우리나라에 본격적으로 구두를 소개한 사람들이었다. 왕족, 외교관, 개화파 인물, 유학생 등과, 기독교를 전도하는 부인, 신교육을 받은 여학생들이 주로 구두를 신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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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0년대 단발머리에 긴 저고리, 짧은 통치마, 흰 양말에 신은 구두는 신여성의 상징이었다. 당시 신여성들은 ‘깨어 있는 여성’ 임을 자랑하려고 벼 두 가마 값이었던 구두를 기꺼이 사 신었다고 한다. 외부에서 신여성들의 자존심을 지켜준 것은 다름 아닌 구두였던 셈이다. 

구도테마공간에는 구두장인공방(Master Shoe Craftsman's Workshop) 코너도 마련돼 현장감을 느끼게 한다. 이 코너에서는 최고급 수제화 제작 프로세스와 함께 구두와 관련된 재미있는 상식도 전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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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두 장인이 되는 길은 멀고도 험했다고 한다. 하견습, 중견습, 상견습 단계를 밟아 비로소 '선생'이 될 수 있었다. 이 기간은 적어도 10여 년의 시간이 필요했다. 그 세월을 견디고 배우면 이미 그들의 손은 구두 재료들을 자유자재로 다루는 장인의 손이 되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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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사람들이 기피하는 산업에는 어김없이 외국인 노동자들이 들어와 있지만 구두산업은 그렇지 않다. 왜 그럴까? "왜 성수동에는 외국인 노동자가 없을까?"라는 질문에 대한 답이 눈길을 끌었다.  

구두산업은 단순 노동이 아니라 특유의 섬세한 손기술을 필요로 한다. 말이 통해야 기술도 설명할 수 있다. 이것이 성수동에 외국인 노동자가 없는 이유라고 설명하고 있다. 고개가 끄덕여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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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두테마공간에는 슈다츠(Shoe Dots) 코너도 있다. 성수동을 시간, 공간, 사람으로 나누어, 성수동이 우리나라 수제화 산업의 중심지인 이유를 소개한다.

이곳에는 서울시장상 등을 수상한 명품 수제화들도 전시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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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수동 수제화 거리의 가장 큰 고민은 무엇일까? 이 공간의 설명문은 그에 대한 답을 준다. 

"지금도 성수동에는 '구두를 배우고 싶다'고 찾아오는 젊은이들이 있다. 그들에게 성수동 구두 장인들은 '요즘 젊은이들은 기술 습득 속도가 빠르니 3~4년만 눈 감고 귀 막고 배우라!"고 조언한다. 하견습, 중견습, 상견습, 선생이 되는 과거 10년 세월을 요구하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힘든 일이 익숙하지 않은 젊은이들이 성수동의 구두 기술을 오랜 시간 배워가는 경우는 드물다고 한다. 자신의 기술을 전수하고 싶어도 받을 사람이 없는 현실. 이것이 요즘 성수동 구두 장인들의 가장 큰 고민이라고 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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