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저널 그날' 히로시마·나가사키 원자폭탄 투하·원폭 돔·조선인 피해자 그리고 일본의 '망각의 기억'
'역사저널 그날' 히로시마·나가사키 원자폭탄 투하·원폭 돔·조선인 피해자 그리고 일본의 '망각의 기억'
  • 유지훈 기자
  • 승인 2019.11.26 22: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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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가경제 유지훈 기자] 일본은 여전히 일제 침략의 역사를 부정하고 있다. 그러나 일본이 비난 받는 또다른 이유는 자신들이 겪은 상처를 부각하면서 자신들을 오히려 전쟁 가해자가 아닌 피해자로 만들려하거나, 자신들로 인해 핍박 받고 목숨을 잃은 수많은 식민지 조선인들에 대한 가해 사실은 무시하려는 처사다.

미군의 히로시마와 나가사키 원폭 투하와 관련해 자신들의 피해만 부각시키려는 논리도 마찬가지다. 정작 원폭투하를 부른 배경이나 가해 사실은 깡그리 잊어버리고, 자신들과 함께 원폭피해를 당한 조선인들의 참상은 무시하거나 아예 인정하려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26일 오후에 방송되는 KBS 1TV '역사저널 그날‘ 245회의 타이틀은 ’히로시마에 원자폭탄 떨어진 날‘이다. 이 시간에는 바로 그같은 일본인의 이중성을 다룰 것으로 보인다.

1945년 8월 6일 오전 8시 15분. 바로 미국 B-29 폭격기 ‘에놀라 게이’가 히로시마현 아이오이 다리 상공에서 ‘리틀보이’라고 명명된 원자폭탄을 투하한 시간이다.

 

[사진= KBS 1TV '역사저널 그날']
[사진= KBS 1TV '역사저널 그날']

 

찰나의 순간, 섭씨 4천도에 달하는 어마어마한 열기와 초속 340m의 거센 폭풍이 히로시마 전체를 집어삼켰다. 도시 전체를 말그대로 ‘초토화’시켰다.

인류 역사상 최악의 살상무기인 원자폭탄의 위력은 정말 무시무시했다. 7만여 명이 현장에서 즉사했고, 폭탄이 떨어진 당일 하루에만 10만여 명이 사망했다. 뿐만 아니라 후유증으로 16만여 명이 목숨을 잃었다. 단일 무기 사상자수로는 모든 게 사상 최대 기록이었다.

“살아 있는 지옥을 봤습니다.” 하지만 전쟁에 몰두한 일본 수뇌부에게 시민들의 수많은 목숨따위가 제대로 보일 리 만무했다. 원폭 투하로 무수한 시민들이 목숨을 잃어도 일본 수뇌부 각료회의는 단 한 차례도 열리지 않았다는 사실이 이를 뒷받침한다.

 

[사진= KBS 1TV '역서저널 그날' 제공]
[사진= KBS 1TV '역서저널 그날' 제공]

 

히로시마 원폭 투하 사흘 후 미국은 나가사키에 두 번째 원자폭탄 ‘팻맨’을 투하했다. 이로 인해 나가사키 시민 약 4만~7만 명이 즉시 사망했다.

미국은 이후에도 12월까지 총 13개의 원자폭탄 투하 계획을 세웠었다고 하니, 만약의 경우지만 일본의 항복 없이 실행됐다면 그 사상자는 엄청난 숫자에 이르렀을 터다.

이날 ‘역사저널 그날’에서는 히로시마에 원폭이 투하된 그날을 재현해 보고, 미국의 계속된 원폭 공격에도 일본이 끝까지 버틴 이유가 무엇이었는지부터 조명한다. 이와 함께 미국이 원자폭탄을 개발한 속내가 무엇이었는지도 들여다본다.

미국의 원자폭탄 개발에는 아인슈타인을 포함, 나치의 탄압을 받다 망명한 유대인 과학자들이 여럿 포함됐다.

 

[사진= KBS 1TV '역사저널 그날' 제공]
[사진= KBS 1TV '역사저널 그날' 제공]

 

1939년 아인슈타인은 루스벨트 미국 대통령에게 “신형 폭탄 한 개만으로 항구 전체와 그 주변을 파괴시킬 수 있다”는 내용의 편지를 보냈다. 그는 나치 독일이 원자폭탄을 만들 수 있다는 경고와 함께 미국의 원폭 개발을 촉구했다.

이후 미국은 독일의 원폭 개발을 견제하면서도 극비의 원폭 개발 프로젝트를 가동했다. 그러던 중 1945년 5월 독일은 항복을 선언했다. 원폭 개발의 주된 원인이 사라진 것이다. 하지만 이후에도 미국은 멈추지 않고 원폭개발을 강행했다.

대한민국이 세계에서 원폭 피해자가 두 번째로 많은 나라라는 사실을 평소 실감하고 있는 사람은 의외로 많지 않을 듯하다.

사상 최대·최악의 살상 무기가 한 순간에 히로시마를 지옥으로 바꾼 날, 그날은 우리 민족과 떼레야 뗄 수 없는 또 다른 아픔의 기억이다. 당시 히로시마에는 강제동원된 조선인들이 많이 거주하던 지역이었기 때문이다.

고된 노동에 시달리던 식민지 조선인 백성들은 원폭 피해까지 입어 수없이 죽거나, 아니면 살아서도 그 후유증에 시달렸다. 하지만 이들은 조선인이라는 이유로 구호를 받지 못했다.

일본은 치료 중에 조선인임이 드러나면 겁박하고, 심지어 치료를 중단한 채 그대로 방치했다.

 

[사진= KBS 1TV '역서저널 그날' 제공]
[사진= KBS 1TV '역서저널 그날' 제공]

 

‘까마귀’. 일본의 화가가 그린 이 그림 한 폭에는 당시 조선인의 참상이 잘 드러나 있다. 일본인 눈에 비친 지옥불 속의 식민지 백성을 볼 수 있다.

이날 ‘역사저널 그날’에서는 히로시마 원폭 투하의 참상 속에서도 버려졌던 그 비참한 조선인의 역사를 되짚어 본다.

우리나라 원폭 피해자의 60%는 경상남도 합천 출신이다. 한 마을 전체가 히로시마로 건너간 곳도 있다.

일본의 잦은 수탈을 못 이겨 돈을 벌기 위해 건너가거나, 강제 동원된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이들이 겪는 원폭 피해는 현재까지도 진행 중이다. 2~3세대까지 이어지고 있다. 하지만 일본은 역사를 외면하듯 이들을 외면하고 있다.

이날 ‘역사저널 그날’에서는 여전히 원폭 피해와 싸우고 있는 류근 시인이 만나본다.

일본은 히로시마와 나가사키 원폭피해를 ‘평화의 상징’으로 활용하는데 열을 올리고 있다. 그러면서 오히려 자신들이 전쟁 피해자인 척 행세를 하고 있다.

미군이 ‘리틀보이’를 투하됐던 지상에는 당시 원폭의 위력을 짐작케 하는 ‘원폭 돔’이 남아 있다.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돼 있는 곳이다.

하지만 지금 ‘원폭 돔’은 ‘망각의 기억’을 만드는 데 이용하는 중요한 도구가 되고 있다. 그 곳에는 전쟁의 가해자가 아닌 피해자 일본만 있고, 일본인 피해자는 있어도 식민지 조선인 피해자는 없다.

이날 ‘역사저널 그날’에서는 철학하는 과학자 김상욱 교수, 한일관계 전문가 오일환 교수와 함께 일본인들의 ‘망각의 기억’, 그 진실의 민낯을 파헤친다. ‘원폭 돔’을 통해 인류 역사가 진정으로 기억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도 생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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