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기업 상품만 살아남을 수도"…소상공인·中企 판로 축소 우려
[메가경제=주영래 기자] 대규모 유통업체의 납품대금 지급기한을 대폭 줄이는 대규모유통업법 개정안을 놓고 유통·중소 납품업계의 반발이 확산하고 있다. 납품업체의 대금 회수 시점을 앞당긴다는 취지에는 공감하지만, 유통업체의 운전자금 부담이 커지면서 발주 축소로 이어질 경우 정작 중소 납품업체와 소상공인의 매출과 판로가 줄어드는 역효과가 날 수 있다는 우려다.
유통업계에 따르면 사단법인 한국플랫폼입점사업자협회에 이어 한국온라인쇼핑협회(KOLSA)도 국회 정무위원회 법안심사 제2소위원회를 통과한 ‘대규모유통업에서의 공정거래에 관한 법률’ 개정안에 대한 재검토를 요구하고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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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유통법 개정에 中企 '비명' [사진=AI] |
앞서 정무위 법안심사 제2소위는 지난 1일 직매입 거래의 납품대금 지급기한을 상품 수령일부터 현행 60일에서 35일로 줄이고, 특약매입·위수탁·매장임대 거래는 월 판매마감일부터 40일에서 20일로 단축하는 내용의 개정안을 의결했다.
한국플랫폼입점사업자협회는 “현장의 목소리를 외면한 채 일방적으로 추진된 개정안에 깊은 유감과 강한 우려를 표한다”며 전면 재검토를 촉구했다.
한국온라인쇼핑협회도 납품업체의 대금 회수를 앞당기고 거래 안전성을 높이려는 입법 취지에는 공감하면서도 일률적인 지급기한 단축이 유통업체의 운전자금과 정산 시스템에 충격을 줄 수 있다고 지적했다. 자금 부담이 거래 축소와 가격 인상, 투자 감소를 거쳐 중소 납품업체와 소비자에게 전가될 수 있다는 주장이다.
◆25일 빨라지는 직매입 대금…“판매 전 돈부터 줄 수도”
업계가 가장 우려하는 대목은 현금흐름이다.
직매입은 유통업체가 상품을 직접 사들여 소유권과 재고·판매 위험을 부담하는 거래다. 개정안이 시행되면 유통업체는 현재보다 최대 25일 빠르게 납품대금을 지급해야 한다.
한국온라인쇼핑협회는 상품이 실제 판매되기 전에 납품대금을 지급하는 사례가 늘면서 단기 차입 증가와 이자비용 상승, 재무구조 악화로 이어질 가능성을 제기했다. 자금 부담이 커지면 상품 매입과 신규 투자가 감소하고 결국 원가 및 소비자 가격 상승으로 연결될 수 있다는 설명이다.
한국플랫폼입점사업자협회도 지급기한 단축이 발주량 감소로 이어질 가능성을 우려하고 있다. 유동성 부담이 커진 유통업체 입장에서는 자금 운용 리스크를 줄이기 위해 상품 매입 규모부터 조정할 수 있기 때문이다.
납품대금을 빨리 받도록 만든 제도가 오히려 납품 기회 자체를 줄일 수 있다는 게 업계의 논리다.
◆“잘 팔리는 대기업 상품부터 산다”…중소 납품업체 먼저 밀릴 우려
발주가 줄어들 경우 중소 납품업체가 상대적으로 더 큰 영향을 받을 가능성도 제기된다.
한국온라인쇼핑협회는 유통업체의 운전자금 여력이 떨어지면 판매 여부가 불확실한 신상품이나 회전율이 낮은 중소기업 제품보다 대기업 인기 상품이나 저가 수입상품을 우선 매입할 가능성이 있다고 주장했다.
대규모유통업법상 지급기한 단축은 대기업 납품업체에도 동일하게 적용된다. 반면 유통업체가 거래처를 줄일 경우 협상력이 약한 신규·중소 납품업체가 먼저 영향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이다.
이에 납품업체 규모와 거래상 지위, 업태와 매입 유형 등을 감안한 차등적인 제도 설계가 필요하다는 게 협회 측 주장이다.
◆정산주기 단축 시 거래 생존율 74%…취약 플랫폼 48% 추산
업계는 정산주기 단축이 거래 생태계에 미칠 충격을 보여주는 연구 결과도 근거로 제시하고 있다.
한국온라인쇼핑협회가 인용한 2026년 한국유통학회 춘계학술대회 발표 연구에 따르면 정산주기를 60일에서 20일로 단축하는 상황을 1년간 시뮬레이션한 결과 전체 파트너 업체의 거래 생존율은 평균 74.0%로 추정됐다.
직매입형 플랫폼 납품업체는 평균 68.9%, 운전자본이 취약한 플랫폼에서는 48.0%까지 떨어지는 것으로 분석됐다. 시장 양극화 지수는 기존 60일 시나리오보다 평균 2.4배 높아지고 사회적 후생은 평균 8.0% 감소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다만 이 연구는 이번 개정안의 직매입 지급기한인 35일이 아닌 ‘20일 정산’을 가정한 시뮬레이션이다. 개정안 시행 효과를 그대로 보여주는 수치로 해석하기에는 한계가 있다.
한국플랫폼입점사업자협회도 별도의 정산주기 관련 연구를 토대로 거래관계 유지율 하락과 대·중소업체 간 양극화 확대 가능성을 제기하고 있다.
◆반품·환불 끝나기 전 대금 지급…온라인 유통 특성도 쟁점
온라인 유통업계는 오프라인과 다른 거래 구조를 법안에 반영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온라인쇼핑과 홈쇼핑은 판매 시점에 매출이 바로 확정되지 않는다. 청약철회와 반품·환불, 카드 정산, 소비자 불만 처리 등의 절차를 거쳐야 한다. 직매입 상품도 표시사항과 인허가, 품질·수량 검수 등에 일정 시간이 필요하다.
한국온라인쇼핑협회는 매출과 하자 책임이 확정되기 전에 납품대금부터 지급할 경우 사후 정산 과정에서 분쟁이 늘어날 수 있다고 지적했다.
유통업체가 자금 회수 위험을 줄이기 위해 반품 가능성이 낮거나 판매 예측이 쉬운 상품 위주로 취급할 경우 소비자의 상품 선택 폭까지 축소될 수 있다는 주장도 내놓고 있다.
◆홈플러스 회생 국면도 변수…“취약 유통사 부담 더 커져”
최근 홈플러스 사태로 납품업체 보호 필요성이 커진 점도 이번 법 개정의 배경 가운데 하나로 거론된다. 그러나 업계에서는 유동성이 취약한 기업에 일률적인 조기 지급 의무를 부과할 경우 오히려 부실을 키울 수 있다는 반론을 제기한다.
한국온라인쇼핑협회는 유통기업의 정상화와 지속 가능한 영업이 전제돼야 납품업체 보호도 가능하다며 조기 지급에 따른 유동성 부담이 커질 경우 회생과 채권 변제 재원이 감소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결국 유통사의 재무 악화가 협력업체와 근로자, 소비자에게까지 연쇄적으로 영향을 줄 수 있다는 논리다.
◆“며칠 빠른 정산보다 안정적 발주”…단계·차등 적용 요구
유통·납품업계는 지급기한 단축 자체를 전면 부정하기보다 시장 충격을 줄이기 위한 보완장치가 필요하다는 입장이다.
한국플랫폼입점사업자협회는 “현장의 중소 납품업체들에게는 당장의 지급기한 며칠 단축보다 지속적이고 안정적인 발주 물량 확보가 생존의 핵심”이라며 “졸속 입법은 납품업체들의 판로와 발주량을 꺾는 결과로 돌아올 수 있다”고 주장했다.
한국온라인쇼핑협회는 시행 유예와 단계적인 지급기한 단축, 업태·거래유형·기업 규모별 차등 적용, 월 1회 정산 기준, 합리적인 반품 유보금 제도 등을 대안으로 제시했다.
직매입 35일, 특약매입 등 20일이라는 단일 기준을 일괄 적용하기보다 충분한 영향평가와 업계 협의를 거쳐 제도를 세밀하게 설계해야 한다는 요구다.
업계 관계자는 “납품업체 보호라는 정책 목표와 안정적인 발주·거래 유지가 서로 충돌하지 않도록 제도를 설계하는 것이 핵심”이라며 “지급기한 단축이 실제 중소 납품업체의 판로 축소로 이어질 가능성에 대한 면밀한 영향 분석이 선행돼야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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