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가경제= 류수근 기자] “피고인은 무죄입니다.”
이춘재 연쇄살인 8차 사건의 범인으로 몰려 20년간 억울한 옥살이를 한 윤성여(53)씨가 사건 발생 32년 만에 재심법정에서 무죄를 선고받았다.
수원지법 형사12부(박정제 부장판사)는 17일 이 사건 재심 선고 공판에서 "과거 수사기관의 부실 수사 및 제출 증거의 오류를 법원이 재판 과정에서 발견하지 못해 잘못된 판결을 내렸다"며 윤씨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재판부는 “이로 인해 20년이라는 오랜 기간 옥고를 거치며 정신적·육체적으로 큰 고통을 받은 피고인에게 사법부 구성원의 일원으로서 사과의 말씀을 드린다"며 "이 선고가 피고인의 명예 회복에 도움이 되길 바란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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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7일 오후 경기도 수원시 영통구 수원지방법원에서 열린 이춘재 연쇄살인 8차 사건 재심 선고공판에서 재심 청구인 윤성여 씨가 무죄를 선고받고 축하를 받고 있다. [사진공동취재단] |
이로써 윤씨는 여중생을 성폭행하고 참혹하게 살해한 강력범죄자라는 오명의 한을 30여 년이 넘어서야 풀게 됐다.이춘재 8차 사건은 1988년 9월 16일 경기 화성군 태안읍 진안리에서 박모(당시 13·중학생) 양이 성폭행을 당한 뒤 살해된 사건이다.
이듬해 범인으로 검거된 윤씨는 1심에서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상소하면서 "경찰의 강압 수사로 허위 자백을 했다"며 혐의를 부인했으나, 2심과 3심 재판부는 이를 모두 기각했다.
20년을 복역하고 2009년 가석방된 윤씨는 이춘재의 범행 자백 이후인 지난해 11월 법원에 재심을 청구했고, 법원은 올해 1월 이를 받아들여 재심 개시 결정을 내렸다.
재판부는 이날 재심 선고 공판에서 "피고인의 자백 진술은 불법체포·감금 상태에서 가혹행위로 얻어진 것이므로 증거능력이 없다"고 판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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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윤씨가 무죄 선고를 받자 재심 재판 전 과정을 도운 박준영 변호사 등이 박수를 치며 축하하고 있다. [사진공동취재단] |
재판부는 무죄 선고 근거로 “소아마비 장애를 가진 피고인의 신체 상태, 범행 현장의 객관적 상황, 피해자 부검감정서 등이 다른 증거와 모순·저촉되고 객관적 합리성이 없다"고 밝혔다.
재판부는 이어 "반면 이춘재의 진술은 그 내용이 매우 구체적이고 합리적이며, 객관적인 증거와 부합해 신빙성이 높다고 판단된다"라고 부연했다.
재판부가 "피고인은 무죄입니다"라는 주문을 낭독하자, 재심 재판 전 과정을 도운 박준영 변호사, 법무법인 다산의 김칠준, 이주희 변호사는 물론 여러 방청객들도 손뼉을 치며 윤씨를 축하하고 함께 기뻐했다.
직후 이 사건을 직접 수사하고 재심 재판을 이끈 수원지검 형사6부 소속 이상혁(사법연수원 36기), 송민주(42기) 검사는 검찰을 대표해 윤씨에게 다시 한 번 사과했다.
윤씨의 재심법정은 지난 2월 1차 공판준비기일을 시작으로 이날 선고공판까지 총 13차례에 걸쳐 열렸다.
그동안 당시 수사기관 관계자와 과학수사 분야 전문가 등 21명의 증인이 출석했고, 8차 사건이 자신의 범행이라고 진술한 이춘재도 증인으로 나왔다.
재심이 시작된 뒤 현재까지 남아 있는 유일한 '객관적 증거'로 사건 현장의 체모가 주목받았다. 국과수가 2017∼2018년께 국가기록원에 이관한 이춘재 8차 사건 감정 관련 기록물 첨부물에 테이프로 붙여진 상태로 30년 넘게 보관돼 온 것이었다.
하지만 이 체모가 DNA 손상 등으로 인해 '판단 불능'(감정 불가) 판정이 나오자 재판부는 8차 사건을 자신의 범행이라고 자백한 이춘재를 직접 법정에 부르기로 결정했다. 재판 과정에서 검찰과 변호인 양측은 모두 이춘재를 증인으로 신청했으며, 법원은 이를 받아들였다.
지난달 2일 이춘재 연쇄살인 8차 사건 재심 9차 공판에 출석한 이춘재는 1986년 연쇄살인 1차 사건 발생 이후 처음으로 일반에 모습을 드러내 자신이 자백한 14건의 살인과 30여 건의 성범죄를 자신이 저질렀다고 재확인했다.
이춘재는 당시 경찰의 대대적인 수사에도 용의선상에 오르지 않은 것에 대한 질문에 "도대체 이해가 되지 않는다"며 "범행 후 증거 등을 은폐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한 번쯤은 의심 받으리라 생각했는데 '보여주기 수사'가 이뤄진 거 같다는 생각을 했다"고 답했다.
이춘재가 법정에 나와 일반에 공개된 것은 그가 자백한 연쇄살인 1차 사건이 발생한 1986년 9월로부터 34년 만이며, 8차 사건이 발생한 1988년 9월로부터 32년 만이었다.
앞서 이춘재는 지난해 9월 부산교도소에서 이뤄진 경찰의 4∼7차 대면조사에서 8차 사건을 포함한 10건의 화성사건과 다른 4건까지 모두 14건의 살인을 저질렀다고 자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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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윤성여 씨가 무죄를 선고받고 법원 청사를 나와 지인들의 축하를 받고 있다. [사진공동취재단] |
무죄가 확정되면서 윤씨는 억울한 옥살이 20년에 대한 형사보상을 받게 된다.
형사 피의자 또는 형사 피고인으로 구금됐던 사람이 불기소 처분을 받거나 무죄 판결을 받았을 때 국가에 청구하는 형사보상금은 무죄 선고가 나온 해의 최저 임금의 5배 안에서 가능하다.
19년 6개월간 복역을 한 윤씨는 대략 17억 6000만원 정도의 형사 보상금을 받을 수 있을 것이라는 전망이 나온다.
이와 별도로 공권력의 잘못된 집행으로 억울한 옥살이를 한 데 대해 국가 등을 상대로 손해배상도 청구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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